仁/正

'40년 망명객' 정경모선생의 자서전〈시대의 불침번〉 친미·친일 비판

I T69 U 2010. 10. 16. 19:13




"한일간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하다"
"고이즈미가 있는 한 한일간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하다"

http://www.hani.co.kr/arti/SERIES/185/353173.html

[인터뷰]팔순의 망명객,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                                      글:박철현 filmtwo@hanmail.net

 

 

 

 

        찢겨진 산하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은 누구?


1924년 서울 출생. 경기중학 졸업후 1945년 일본 게이오 대학 의학부 예과를 수료한 후 도미. 1950년 미국 에모리 대학 문리과대학을 졸업한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애국의 일념에서 미국군에 지원입대, 당시 맥아더사령부에서 통역요원으로 지내면서 문익환, 박형규 목사 등과 친분을 쌓았다.

휴전 이후에도 유엔군 군사정전위원회 소속으로 56년까지 활동했으나 미군의 침략성과 차별에 분노하며 정전위원회직을 사퇴했다. 한국정부의 기술고문으로 활동하던중 이승만 정권의 친미. 반민족성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그만둔 후 이후 미국서 10년간 생활하면서 브루스 커밍스등과 교분을 쌓으며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1970년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면서 활발한 문필활동을 통해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매진했다. 73년 『민족시보』 주필을 역임했으며, 이 해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을 때 <세카이> 9월호에 기고한 그의 글을 통해 그때만 하더라도 인지도가 없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사회에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1980년 "씨알의 힘"이라는 사숙을 열어 남북통일의 이론적 틀을 제공함을 물론, 재일조선인 문제에도 천착하면서 재일조선인 사회의 대표적인 통일운동가이자 이론가로 활약했다.

그의 주장 및 이론은 잡지 "씨알의 힘"(씨알의 힘 발간. 1~9호)에도 실렸는데, 6호 "삼선각 운상 경륜문답"(<찢겨진 산하>의 오리지널판)은 민족지도자 김구, 여운형, 장준하 선생 등이 사망 후 천상에서 민족의 미래를 논하는 희곡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찢겨진 산하>는 80년대 중반 해적판으로 국내에 역수입돼 당시 운동권들의 필독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저서로 『어느 한국인의 생각』 『일본인과 한국인』 『한국민중과 일본』 『기로에 선 한국』 『찢겨진 산하』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등이 있으며, 역서로 『한국전쟁의 기원』등이 있다.

정 선생은 올해로 망명생활 34년째를 맞이하고 있으며, 현재는 요코하마 히요시의 자택에서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처와 2남이 있으며, 차남 아영은 "제주 4.3 사건을 생각하는 모임(오사카)"의 사무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인 재일 통일운동가로 알려진 정경모 선생. 지난 89년 고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주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지난 4월 3일 선생을 만나 최근의 북일 관계, 우경화로 급선회하는 고이즈미 내각 등에 대해 들어보게 되었다.

인터뷰는 요코하마 히요시의 한 커피숍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선생은 "일본정부의 우경화는 고이즈미 총리 개인의 성향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며 "역사적 흐름 속에서 봐야 할 것"을 주장하면서 완결된 근거를 제시하였다.

덧붙여 선생은 "20세기 초부터 지속되어 온 일본과 미국과의 커넥션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면서 "한국사람들은 정보 면에서 부족하고, 또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감정만으로 일본을 적대시하는데, 이러면 오래되지 않은 장래에 또 큰일 당한다"며 과학적 사고와 판단을 요구했다.

한국의 정보기관조차 파악하고 있을지 의문이라는, 일 방위청 군사작전 "미쓰야(三矢)작전"과 패전 이후 1급 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의 석방이 가지는 연관성, 60년 "안보투쟁"의 암초를 만나 일시 퇴장한 것처럼 보였던 일본의 친미 우익의 생명력 등에 대해 쏟아냈다.

- 인터뷰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년에 한 신문의 기사에서 본 것인데 8.15에 관한 기사 중 "미군 환영하러 갔다가 쓰러졌지요..."라는 기사가 있어요. 그 안에 당시 미군의 경비를 맡았던 일본경찰이 발포한 것이 정당하다고 미군이 일본측 손을 들어줬는데,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 두 사람의 이름이었어요."

- 저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후손들이 그때 살해당한 두 분을 독립유공자로 대우해 주길 정부에 요구하는 그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 두 사람이 사실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 사람이거든요. 그 기사에는 그냥 노조위원장, 보안대원 등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전 이 사건이 아주 상징적이라고 봅니다. 그 두 사람의 살해에 미국과 일본이 동시에 개입했다는 것. 피해자들이 좌우합작을 추진한 건준 소속으로 미군 환영차 인천으로 들어간 첫 날 일본경찰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은 아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죠."

- 그런데, 이름이 밝혀졌다는 것이 어떤 중요한 의미라도 있습니까?
"그건 제가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을 일본어로 번역을 했는데, 그 책 안에 저 사건이 등장해요. 그런데, 브루스 커밍스도 이름을 모르는지 명시하지 않았더군요. 저도 번역을 하면서 누굴까 하면서 계속 자료를 찾았는데, 건준 소속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도저히 이름이 나오지 않더군요. 이름이 나와야 다른 정보나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면 보다 깊이 있게 다룰 수가 있으니까..."

-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의 현대사, 특히 6.25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는 필독서로 꼽히기도 합니다만, 직접 번역을 해 보시니까 어떻던가요?
"제가 처음 그 책을 접하고 놀란 것은 이 양반이 너무나 정확하게 해방 당시 한국사회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총체적 사고라고 할까요? 지금 한국, 미국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일반인들이 1950년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새벽에 총을 한방 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라고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커밍스의 관점은 그게 아니 예요."

-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면.
"커밍스는 미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한 1945년 9월 8일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입장이지요. 아까 말한 두 명의 한국인 두 사람이 사살당한 날. <한국전쟁의 기원>은 1945년부터 다루기 시작해 1947년에 끝이 납니다. 미군의 마지막 부대가 철수한 날이 1948년 6월이고, 실제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인데, 이 책은 1947년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후는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가게 돼 있다고 판단한 셈이지요. 말 그대로 "기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 커밍스 교수가 일전에 일본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은 전세계 약 50여 개 국에서 번역되었지만, 그 중에 정경모가 번역한 것이 가장 충실하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글쎄요. 그 양반이 일부러 한 말 같기도 하고. 어느 번역자나 마찬가지겠지만 저 역시 그 책을 번역할 때 최대한 충실하자는 생각을 했죠. 이를테면 각주나, 주석 같은 것도 전부 번역하고.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책이 세 군데 출판사에서 나왔더군요. 저도 지인한테 받아서 다 읽어 보았는데, 주석이 많이 빠져있었습니다. 이 책은 주석이 참 중요한데. 좀 아쉽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 <한국전쟁의 기원>뿐 아니라, 80년대 중반 운동권들의 필독서이기도 했던 <찢겨진 산하>,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를 집필하시기도 하셨지요?
"아, 그건 원래는 일본어로 쓴 건데, 일본어 좀 하는 친구들이 그걸 번역해서 해적판으로 만들어 돌렸나 봐요. 제 허락도 없이. <찢겨진 산하> 같은 경우엔 지금은 한겨레신문사에서 펴내 사람들이 많이 읽고 있다고 하던데, 원래는 한 10년 전쯤에 나올 수도 있었어요"

- 저도 읽어보았습니다만,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논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문민정부 당시였고 또 사회과학서적들도 대부분 해금조치가 내려졌지 않았습니까?
"제 개인적인 것도 많이 작용했습니다. 문익환 목사가 돌아가시기 직전인 94년 1월, 그러니까 닷새 전에 나한테 전화를 했어요. 그때 문 목사가 전화로 "그전에 쓴 이거(<찢겨진 산하>)를 정 선생이 직접 우리말로 재 번역 해서 보충할 것이 있으면 보충해서 원고를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당시 문 목사가 범민련 그만두고 나와서 만든 "통일맞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첫 번째 프로젝트로 하려고 했던 게 바로 이거 재 번역이라 그러더군요. 내가 우리말로 번역해서 보충할 것이 있으면 보충하고... 그런데, 그렇게 전화하고 5일만에 그 양반이 돌아가셨어요."



- 망명생활은 70년도부터 시작하셨으니 벌써 34년에 걸친 오랜 세월이군요.
"벌써 그렇게 되나? 일본에 정착한 게 72년이고 73년부터 한통련 기관지인 <민족시보> 주필을 했었으니까, 일본에서만 32년 망명생활을 한 셈이네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게 73년 9월호 <세카이(世界)>에 실린 "한국의 제 2의 해방과 일본의 민주주의"라는 글인 것 같은데, 9월호가 서점에 깔린 날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어요. 얼마 전까지 한통련 의장이었던 곽동의 씨가 일본 기자들에게 세카이를 100여부 돌렸지. 그것 때문에 <세카이>가 한 100만부 정도나 팔렸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김대중씨는 그렇게 유명인사가 아니라서 사람들이 잘 몰랐는데 그 기사 속에 포함돼 있어서 일본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됐죠."

- 지난해 가을 "해외민주인사 고국방문" 때 선생님 이름도 거론됐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옛날에 문 목사하고 같이 활동했던 박형규 목사가 그때 전화를 해왔더군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라는 데서 연락을 받았는데 들어와도 된다고 하면서 영사관으로 여권을 받으러 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영사관으로 갔는데, 아, 글쎄 영사관에서는 내가 방북한 사실을 거론하면서 마치 스파이 취급을 하더군요. 즉 그러니까 날더러 자수하라는 식으로 말하더라구요.

그런데 내가 그걸 자인해 버리면 지금까지 해 온게 뭐가 되나요? 그리고 그건 또 내 개인적인 문제뿐만 아니예요. 89년 문 목사와 같이 방북한 것에 대해 내가 "자수서"를 써버린다면, 문 목사가 일생 동안 목숨바쳐가며 해온 것까지 내가 전부 부인해버리는 셈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 작년에 모처럼의 고국방문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만 현재 송두율 교수의 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선생님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 나이가 80이 넘었어요. 나도 고향에 가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지요. 거기 내 이름자 석자 쓰고 나만 가겠다고 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신념이나 철학은 물론 문 목사와의 관계 등 도의적인 것도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거절했어요.

그리고 망명이라는 것은 본국에서 쫓겨났다는, 그러니까 법적으로 본국의 아무런 혜택과 보장을 못 받는다는 말인데 독일국적을 가지고 있는 송두율 교수의 경우는 좀 틀리지요. 참고로 윤이상 선생 같은 경우엔 독일관리가 직접 공항까지 나와서 국적을 주었습니다. 나라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아마 독일에서 운동하던 사람들은 국적을 가지고 민족운동하는게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 송 교수도 독일국적을 가지고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겠죠. 그런데 사실 내가 일본에 망명해 있으면서 일본국적 가지고 민족운동을 한다고 그러면 그게 말이 안되잖아요"

- 송두율 교수의 7년 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무슨 재판할 일입니까? 게다가 7년씩이나 형을 때리고... 아주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납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짓입니까?"

- 화제를 돌려서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싸고 작년 8월과 올해 초 두 번의 6자 회담이 열렸는데 가시적 성과는 그다지 없는 상황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6자 회담은 앞으로도 계속 열릴 예정이라고 하는데 통일문제, 북한문제 전문가로서 6자 회담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먼저 본질을 이야기하자면 북한 핵 문제는 북한과 미국 양국간의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미국이 선제 공격을 가해서 북한을 때리느냐, 아니면 북한이 그걸 피하기 위해 먼저 항복을 하거나, 혹은 그 선제공격에 맞서서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죠. 이건 기본적으로 양국이 해결해야 할, 그러니까 북-미 간의 문제입니다. 선제공격을 가할 것인지, 항복을 할 것인지 등은 한국이나 일본, 러시아, 중국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지요."

- 그렇지만 이미 북미협상에서 6자 회담으로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물론 북한의 외교 전략상 양보한 측면이 있지만, 정작 궁금한 건 그 안에서 미국이 왜 다른 나라들을 끌여들었는지에 관한 것인데요.
"미국의 신가이드라인이나 태평양 방위전략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자존심 때문이라고 봅니다. 자기네들 같이 초강대국이 보잘것없는 북한을 상대하면서 1대1로 상대한 것은 창피하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하는데요. 사실 핵을 가지고 있는지도 아직 확실히 모르는 것도 있지만. 아무튼 몇 마디 하면 들을 줄 알았는데, 북한이 자꾸 대드니까, 그렇다고 해서 창피하게 계속 끌려 다닐 수도 없는 거고. 그래서 다자회담을 제의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름대로 미국을 견제하고 있는 강대국들이 미국이 끌어들인다고 해서 들어갈 나라들은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많습니다.
"초기 입장과 지금 상황은 많이 틀린데, 처음 6자 회담 논의가 있었을 때 중국으로서는 사실 별로 가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중국은 북한 핵 문제는 양자간의 문제라는 입장을 줄곧 견지하고 있었거든요. 러시아도 마찬가지예요. 핵 문제는 상당히 델리케이트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안 들어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의 6자 회담을 지켜보면서 나는 미국이 상당히 실수했다고 보는 게, 대표적으로 중국의 위상 변화입니다. 사실 처음 6자 회담이 그랬어요. 중국은 초기의 입장대로 안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무튼 이왕 하게 됐으니 그냥 제3국으로서 장소나 제공하고 미국 쪽도 북한 쪽도 편들지 않으려고 했죠. 또 미국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고.

그런데 1차 회담 딱 끝나고 보니까 중국이 완전히 동아시아의 외교 주도권을 잡아버린 결과가 나와버렸어요. 가장 이득 본거죠. 별로 신경도 안 쓰고 회의 테이블만 제공해줬을 뿐인데, 외신들이 칭찬하고 난리가 나면서 덩달아 이미지도 좋아졌습니다. 그러니까 2차 회담 때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나머지 5개국 스케줄도 조정하고, 또 각국의 양자회담도 주선하는 등 발군의 활약을 펼친 것이겠지요. 사실 6자 회담은 중국을 위한 회담이 아닌가 생각도 있습니다."

- 러시아는 어떻습니까? 러시아와 북한이 전통적 우방 관계이기 때문에 들어왔지 않겠느냐 라는 분석도 있지만 일면 시베리아 철도 등 경제적인 이유로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분석도 있습니다만.
"글쎄요. 러시아의 경우는 조금 틀린데, 경제적 이유라고 한다면 "코러스 라인"이라는 프로젝트겠지요. "코리아-러시아 라인"을 줄여서 그렇게 부르는데, 그게 뭐냐면 사할린에 매장되어 있는 천연가스를 북한과 한국, 그리고 나아가서는 해저터널을 이용해서 일본에도 공급하는 대공사입니다.

그런데 그 사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가스관 공사를 미국 석유자본인 모빌(Mobil)이 하고 있어요. 러시아로서는 이게 정말 큰 국책사업인데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안되니까, 아무래도 부자 몸조심한 것 아닐까요? 미 석유자본이 압력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두 나라 모두 일단 손해는 보지 않는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에 들어온 거고, 결국엔 나름대로 각자 목표를 달성한게 아닐까 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제일 득을 본 나라는 중국이고."

- 일본은 어떻습니까? 일본정부는 1차 6자 회담은 물론 2차에서도 줄곧 북한 핵 문제와 상관없는 자국민 납치문제 상정만을 외치고 있어서 각국으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는데요.
"핀잔 들을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일제가 조선 반도 점령 시절 240만 명의 노동자를 강제로 연행을 했어요. 게다가 한국의 윤정옥 교수(전 정대협 대표)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에서만 10만 명 끌어다가 종군위안부로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걸 중국, 미국도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자국민 5명 납치된 "사실"을 자꾸 상정해달라고 하니 짜증나는 거지요. 6자 회담이라는 게 원래 미국이 일부러 중국하고 러시아 끌어들인 건데, 그들만 키워주는 꼴이 되어서 답답해 죽겠는데, 옆에서 일본이 자꾸 북한 핵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네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얼마나 복장이 터지겠습니까? 난 이 사람들이 정말 상식이 있는지 없는지 의문이 갈 때가 있어요. 자기네들이 한 범죄와 잘못은 전혀 뉘우치지도 않은 채 자꾸만 지네 고집만 피우고 있으니…."

- 그런데 일본은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올까요? 이번에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과 더불어 계속 일본인 납치 문제를 들고 나오는 이유가 역시 자위대의 보통 군대화와 평화헌법 9조의 개정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지금 이런 일본의 우경화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사람이 고이즈미 총리이고, 그 고이즈미 내각의 넘버2가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 입니다. 많은 사람들도 들어봤겠지만, 아베 신조의 조부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1급 전범이예요.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군에 붙들려서 1급 전범으로 처형된 사람이 도죠 히데끼를 포함해서 총 7명입니다. 그 처형된 날짜가 1948년 12월 23일입니다. 그런데 도죠나 기시나 다 1급 전범이고 기시도 당연히 23일 날 처형되었어야 하는 건데, 그 다음날인 24일 기시는 무죄 석방이 되었고 나중에 총리까지 했지요."

-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군국주의자들, 특히 주모자들은 종전 당시 연합군에 의해 처형 당해 야스쿠니신사에 위패가 봉안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외입니다.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아무튼 그때 관방장관이 사토 에이사쿠입니다. 당시 점령군이었던 미군정의 대변인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바로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입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미군은 언젠가는 일본땅을 떠야 합니다. 그런데 소련과 이데올로기 문제로 대립하는 시기가 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신의 방패 막을 설정해 놓아야 하는데, 그 방패 막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일본과 한국이었습니다."

- 정리를 하자면, 당시 미 점령군이 소련과의 대립구조를 생각하여 일본과 한국에 친미파 정권을 세워야겠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시 노부스케는 상당히 이용가치가 많았어요. 그렇다면 자기에게 대든 1급 전범인 기시에게 미국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인데, 그건 기시의 과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전범으로, 그리고 전후 경제부흥을 일으킨 총리로서 기시 노부스케를 알고 있지만, 이 사람이 1930년대 만주 국의 수반이었다는 사실은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 만주국이라면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한 일본의 대륙진출 전진기지로 설치된 괴뢰국을 말하는 거죠?
"네. 만주괴뢰국. 그게 생기면서 기시가 그곳을 관리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굉장히 그곳의 경제발전에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만주가 당시에는 소련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시는 소련과 대립하면서 할 거 다 했지요. 그리고 당시 미 점령군의 대변인이었던 사토 에이사쿠의 말도 있고. 이것저것 조사해 보니까 기시가 가장 신뢰감이 간다는 것이지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고 들어봤나요?"

- 20세기 초 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가쓰라 타로와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특사였던 태프트 국방장관 사이에서 진행된,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시켜 준 밀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1905년 7월, 그러니까 포츠머스 조약이 나오기 두 달 전에 한 협잡인데, 내용은 필리핀과 한반도를 바꿔 치기 하자는 겁니다. 물론 미영일 3국 동맹도 들어가지만, 요점은 필리핀은 미국이, 한반도는 일본이 지배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1905년 11월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치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성립되었어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빨리 순식간에 가능했냐 면, 그리고 그렇게 당당하게 고종황제를 협박하고 그러는 게 가능했냐 면, 그 뒤에 미국과 맺었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일본과 미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공존공생 관계에 놓여있었다는 것이지요. 조지 캐넌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습니까?"

- 미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 전문가로 알고 있습니다.
"조지 캐넌은 1940년대에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최초로 입안한 사람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100살이 넘었는데, 지금도 살아있지요. 흔히 "캐넌 구상"이라고 불리는 이 내용 중에는 "조선반도의 봉쇄정책"이라는 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거 아는 사람이 한국 내에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미 국방부의 비밀문서를 보고 저한테 알려준 것이니까요.

아무튼 그 내용은 조선반도를 타고 내려오는 소련 세력을 미 정부가 어떻게 하면 막을 수가 있겠는가에 대한 대책인데, 사실 별거 없습니다. 그렇지만 무서운 구상이기도 하지요. 왜 무섭냐 면, 바로 "가쓰라-태프트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주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구 식민지였던 곳, 그러니까 한반도와 만주 등을 일본의 재 지배에 맡겨야 한반도를 타고 내려오는 소련 세력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캐넌 구상"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걸 트루먼이 받아들였죠. 이런 얘기는 조선이 막 해방되고 난 직후, 그러니까 한국전쟁 전에 나온 얘기들입니다."

- 무섭군요. 정리를 하자면 해방 이후 미군이 45년 조선반도에 들어올 때 이미 저런 구상이 서 있었다는 것인가요?
"그래요. 그래서 내가 제일 처음 말한 하지가 지휘한 24군단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2명의 건국준비위원회 사람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에 관한 글도 써보고 싶다는 것도 다 이런 맥락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아까 말한 기시 노부스케의 석방을 봐야 됩니다. 기시가 태평양전쟁 후 전범이 되어서 스가모 형무소에 잡혀 있었을 때, OSS(미 CIA의 전신) 요원들이 수시로 들락날락거렸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 그렇다면 "1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가 석방된 건 미국의 도움을 받은 결과군요.
"정리를 하자면 이런 겁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재탕인 "캐넌 구상"을 트루먼 대통령은 전폭적으로 지지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일본에 의한 "구 식민지(만주, 한반도)의 재 지배"로 축약되는데, 그렇다면 과연 일본에 있는 사람들 중에 소련과 대립하면서 식민지 지배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친미 우익이 누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전후 피폐한 일본의 경제를 살릴 능력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이왕이면 자기네들의 대변인인 사토 에이사쿠하고도 연관이 있으면 좋습니다. 그런 조건에 들어맞는 유일무이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기시 노부스케라는 겁니다.

기시 노부스케는 그렇기 때문에 옥중에 있을 때부터 자신이 미국의 강력한 지지 하에서 총리가 될 것도, 그리고 조선반도에서 큰 전쟁이 일어날 것도 알고 있었어요. 주위 측근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요. 한반도에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러면 조선반도에 미국이 들어가 점령할 것이고 그러면 그 지배권은 자신들 일본이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야."

- 말씀을 듣다 보니,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시작하여 캐넌 구상, 기시 노부스케의 석방,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초 중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사회 움직임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망명객 노릇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사실을 옛날부터 계속 말해왔으니까. 친미파나 친일파 세력이 권력을 쥐고 있었던 이승만 정권과 군사독재 정권의 눈엣가시였겠지요. 솔직한 말로 미국하고 일본에 꼼짝 못하는 게 우리나라 아닌가요? 내가 여기니까 그나마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한국의 어느 다방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생각해 봐요. 아마 지금도 정보기관에서 누가 오지 않을까 하는데…."

-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물론 부족하긴 하지만요. 공개적으로 친일인명사전도 만드는 시대이고, 또 그런 것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도 좋습니다. 지난 97년의 정권 교체 이후 한국도 꽤나 민주화가 진전되었거든요.
"하긴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도 되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기시 노부스케가 풀려 나오고 그가 예언한 대로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엔 분단상태로 휴전에 들어가 버렸어요. 미국이 예상한 캐넌 구상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런데 미 정부가 이걸 포기했을까요? 아닙니다. 미소 냉전시대로 돌입하면서 여전히 유의미한 구상으로 남게 되지요. 그리고 기시 노부스케는 1958년 일본수상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 기록에 보면 기시 노부스케는 62년에 그만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4년간 총리를 했다는 것인데요. 미국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기엔 너무 짧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실제 미국이 만든 법안인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해야 된다는 말도 계속하는 등 미국과 대립하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만.
"1960년에 한국에 뭐가 있었지요?"

- 1960년이라면, 4·19 혁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4·19 혁명. 당시 일본에도 비슷한 게 있었습니다. 일본의 학생·노동 운동의 역사에 길이 남을 "안보투쟁"이라는 것인데, 그 때 수십 만 명이 모여서 지금 나가타쵸의 국회의사당 앞을 점거했었어요. 60년 6월이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 "안보투쟁"이 무엇이냐 면 "미일안보조약 반대투쟁"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예요.

내용은 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기한이 원래 10년으로 끝나서 기시 노부스케가 다시 갱신을 해야 했는데, 이걸 반대하기 위해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난 투쟁이지요."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라면 미국과 일본의 약속으로 일본이 그간 저지른 동아시아의 침략 사 왜곡과 각국의 배상 문제 등에 있어 일본에 면죄부를 준 조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일본인들에게는 그 조약 자체가 이미 미국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이 되어 버리니까요. 그러니, 동아시아 왜곡에 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양심적인 사람들도 거리로 나오고, 미국에 졸졸 따라다니는 것에 분노하는 민족주의자들도 나오고.

그때 미국에서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가 워낙 일본사회가 혼란상태로 빠지니까 문제 해결을 위해 왔어요. 해러튼이라는 사람인데, 그때 그 사람이 탄 차가 학생들에게 막히자 헬기가 출동하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결국 그때 데모대가 국회까지 들어가서 기시 노부스케 허벅지를 찌르는 혁명 전야 같은 사태가 발생하고 결국 기시가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하겠다고 했습니다. 민중들의 저항에 항복한 것이지요."

- 그렇다면 기시 노부스케와 미국과의 관계는 끊어진 것인가요?
"아니지요. 비록 실각은 했지만, 일본 정치란 게 그렇지 않거든요. 배후의 파벌이란 게 있으니까. 1965년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죠?"

- 김종필·오히라 회담이 있었습니다. 치욕적인 한일협정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개중에는 그것 때문에 한국경제가 전후의 아픔을 딛고 일어났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생각하는 사람들 가치관 차이인 것 같고. 중요한 것은 그때 그 중요한 국가적 대사를 치른 일본총리가 바로 사토 에이사쿠라는 점입니다."

- 사토 에이사쿠라면, 아까 말씀하셨던 전후 관방장관이었던 그 사람과 동일인물입니까?
"네.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이자,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미군정의 대변인 노릇을 했던 관방장관 "사토 에이사쿠" 그 사람입니다. 원래는 기시 노부스케가 한일협정을 했어야 하는 건데, "안보투쟁"이 일어났단 말이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어요. 그래서 기시는 뒤로 물러났어요. 그렇지만, 사람만 바뀌었을 뿐 사실 똑같은 생각을 가진 이란 성 쌍둥이가 총리로 올랐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한일협정이 과연 제대로 된 국교정상화인가, 쉽게 말해서 자주적인 입장에서 한일협정을 체결했냐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데, 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과 "캐넌구상"의 연장선상에서 한일협정을 보고 있습니다.

즉 "한일협정"은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40년대 초 중반의 캐넌 구상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결국 일본에 의한 과거 식민지 재 지배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 기시 노부스케가 수반으로 있던 만주국의 사관학교를 나온 박정희, 아니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 지금 일본의 우경화 경향은 모두 20세기 초·중반의 역사적 흐름을 잇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지금 한참 논란이 되고 있는 이라크 파병문제를 이야기해 봅시다. 기시가 총리가 된 58년도에 제일 강력하게 추진한 것이 평화헌법 9조 철폐였습니다. 왜 그러냐 면 45년 당시 미 점령군이 평화헌법 9조를 만들 때만 하더라도 한반도전쟁(6·25)에서 미국이 길 다 닦아 놓고, 일본은 들어가서 지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군대가 굳이 없어도 괜찮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미국 입장에서도 한번 진주만 습격 당했었고, 또 다른 연합국의 요구도 있고 하니까 "일본은 군대를 보유할 수 없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면 안 된다"는 조항을 집어 넣어도 괜찮겠지 라고 생각한 거였거든요. 그건 서로 합의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이 미국과 일본이 생각한 대로 안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 버리니까, 일본만 큰일난 것입니다. 평화헌법 9조에 얽매여 군대를 가질 수 없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기시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철폐를 주장할 수밖에. 그는 한층 더 나아가 "일본은 핵무장을 해야 한다, 또 치안유지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치안유지법은 쉽게 말하면 한국의 국가보안법입니다. 국가보안법이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베껴서 만든 것이니까. 결론이 무엇이냐 면 군국주의로 돌아가겠다는 소리입니다. 다만 그 군국주의는 한층 더 세련되었죠. 미국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보면 말입니다."

- 그렇지만, 평화헌법 9조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고이즈미 내각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본다면 좀 근거가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반세기를 이어온 무언가가 있을 듯 합니다만.
"일본 방위청에서 63년 입안한 "미쓰야(三矢-세 개의 화살)작전"이라는 군사작전이 있습니다. 기시가 총리 시절 일본 방위청에서 입안한 것인데, 이게 무슨 작전이냐 하면 한반도에 제2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일본의 개입에 관한 군사작전입니다.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 일, 한국이 동시에 북한을 쳐들어간다는 작전입니다. 즉, 미, 일, 한국이 세 개의 화살이 되는 것이지요. 이 작전은 7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제4단계부터 일본이 한반도에 상륙하게 됩니다. 마지막 7단계는 미국이 원폭을 한반도에 투하하는 걸로 되어 있고."

- 그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듯한데요. 구체적인 정보 출처나 근거가 있습니까?
"이쪽에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입니다. 근거라고 한다면, 일본에서 과거 이 "미쓰야 작전" 때문에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40년 전 이야기니까 하긴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르겠군요.

1965년 사회당 국회의원들이 이 작전에 관한 정보를 빼내어서 국회청문회를 열었는데, 당시 정부는 이 작전명을 호도하기 위해, 그러니까 일본이 한반도에 상륙하고 미 일 한 3국 연합군이 북한을 친다는 내용 등을 감추기 위해 당시 사회당 의원들의 질문에 "미쓰야는 쇼와 38년(63년)에 입안한 정책이기 때문에 38(일본식 표기는 미쓰야)이라는 숫자를 따서 미쓰야라고 했을 뿐이다"고 하면서 "절대 미·일·한 3국 연합과는 상관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회당 의원들이 진짜 준비를 많이 했지요. "작전 내용을 다 공개해도 괜찮겠느냐"는 식으로 과격하게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정부는 책임을 진다면서 꼬리를 내렸지요. 즉,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고 방위청장관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물러났습니다. 그 때 해임된, 즉"미쓰야 작전"을 설계한 방위청장관이 바로 고이즈미 준야, 즉 지금 고이즈미 총리의 아버지입니다."

- 소름끼치는 이야기입니다. 기시의 후예라는 것이 지금은 그냥 일상적인 레퍼토리처럼 되어 있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면에는 이런 사실들이 숨어 있었군요.
"한국 사람들은 지금 왜 일본이 우경화되어 가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조건 일본의 우경화를 조심하라 그러는데, 왜 조심해야 되는지에 대해 물어보면 고이즈미가 어쩌구 저쩌구 합니다. 그런데 "고이즈미는 왜 그럴까요" 라고 되물어 버리면 할 말이 없어지지요.

그건 역사적 맥락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고이즈미하고 아베 신조가 뭐라고 하고 있나요? 옛날에 기시가 다 했던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평화헌법 9조 폐기, 그리고 북한이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서 서서히 핵무장 준비하려고 하고 있지요.

지금 이라크 상황이 종료되면 어떻게 될 것 같나요? "부흥지원 잘 도와주고 돌아왔습니다" 하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돌아갈까요? 아닙니다. 바로 자위대 군대화 추진할 겁니다. 평화헌법 9조 없앱니다. 제 말은 그때 땅을 치고 후회하지 말고 미리미리 한반도도 대처하고 준비하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평화적인 한일 공존의 시대는 불가능하다고 보시는 입장입니까?
"허허, 글쎄요. 지금 고이즈미 총리가 실각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미국이 개입할 생각이 전혀 없고, 또 국민들의 지지가 뒷받침 되어 주고 있을 뿐더러, 기시의 정신을 이어받은 아베라는 든든한 파트너도 있는데 왜 실각할까요? 그들이 북한을 겨냥해서, 나아가 한반도 전체를 겨냥해서 군대를 만들려고, 핵무장을 하려고 하고 있는데 "평화적 공존"이라…. 난 절대 불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고이즈미가 있는 한 한일간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끝났다. 

▒ 게시일 : 2004-04-23 오후 4:13:48

 

 

 

[3]  2002년 새롭게 펴낸 전설의 역저 [찢겨진 산하]

20년 전 80년대 우리 역사의 진실을 알고자했던 사람들에게 한편의 교과서였던 [찢겨진 산하] 일본어로 출간되어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물론 대학교의 역사 교재에서 의도적으로 왜곡한 남북 분단사에 경종을 울린 바 있는 [찢겨진 산하]는 이제, 잊혀진 역사가 되어가고 있는 한국 현대사와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했던 선각자들의 삶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김구·여운형·장준하가 말하는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사

해방 이후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여운형과 김구, 19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에 저항하다 피살당한 장준하 이 세 사람이 사후세계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실에서 함께 하지 못한 민족주의자 세 명의 가상 대화를 통해 해방 이후 미·소의 남북 분할 점령과 좌우 대립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격동기에 우리의 선각자들이 민족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어떻게 싸워왔는지, 강대국의 분단에 장단을 맞추어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수구세력의 실상은 어떤 것인지 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해방 이후 좌우합작운동과 반민특위 활동, 찬탁과 반탁 운동, 김구의 반외세 민족자주노선 등 우리 현대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역사적 사건들과 이를 주도했던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역사 서술은 상상의 대화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동안 학계와 언론에서 외면했던 진실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역사 해석이 8·15 해방으로부터 6·25까지의 좌우 대립의 근본 원인을 강대국의 세력 다툼에서 찾았다면 이 책은 보다 구체적인 두 가지 문제, 즉 친일 행위와 농지 소유관계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중요한 현실적 쟁점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 등장하는 이완용, 이광수, 윤치호, 함석헌, 최린 등 60명이 넘는 인물 자료는 상상에 의거한 역사 서술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의 생생한 현장 속으로 독자들을 이끌고 있다.


* 등장인물 *

백범 김구(1876~1949)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일제시대 해외 불령선인 제 1호.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남북협상에 나서 이승만과 대립.
이승만에 의해 암살 당했다. 해방 당시 70세.

몽양 여운형(1886~1947)
독립운동의 거성. 일제시대 국내 불령선인 제 1호. 해방 후 좌우합작 운동을 추진.
이것의 성공을 두려워 한 이승만 패거리들에 의해 암살 당했다. 해방 당시 60세.

장준하(1919~1975)
일제시대 일본신학교 재학중 '학도지원병'으로 뽑혀 북지(北支) 파견군에 입대.
쉬저우에서 탈주하여 충칭에 도착, 임정의 광복군에 가담했다.
해방 후 잡지 <사상계>를 발행하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다가 박정희에 의해 암살당했다. 해방 당시 27세.

기록(지은이) 정경모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 의학부 예과, 서울대 의대,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수학했다.
1950년 6·25가 일어나자 미 국방성 직원으로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회담에도 참가했다.
1970년 일본으로 건너가 <씨알의 힘>등 문필활동을 민주화, 통일운동을 지원하였으며,
지금까지 고국땅을 밟지 못한 채 30년 넘게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1. 잘못 채워진 첫 단추 ... 17
2. 이간질과 살인행위는 한민당의 장기 ... 23
3. 지킬 박사 김성수와 <동아일보>의 문화 ... 32
4. 장덕수의 교훈 ... 40
5. 여운형 용공노선의 의미 ... 51
6. 성서와 마르크스 ... 61
7. 김구의 반탁 ... 67
8. 동상이몽의 반탁운동 ... 74
9. 빗나간 친미반소 ... 82
10. 여운형의 찬탁 ... 87
11. 이승만의 반탁 ... 92
12. 비난의 표적이 된 김구 ... 100
13.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메논 ... 108
14. 여운형의 좌우합작 ... 122
15. 여운형의 암살 ... 131
16. 김구의 남북협상 ... 136
17. 김구 암살 ... 145
18. 장준하 암살 ... 151
19. 6.25의 진상 ... 158
20. 한국전쟁에서 얻은 미국의 이득 ... 164
21. 최초의 한 발은 과연 누가 쏘았나? ... 167
22. 최능진과 조봉암의 처형 ... 175
...
36. 저편에 보이는 빛 ... 266

맺음말 ... 279

주 ... 285

 

 

 

 

 

 

 

 

 

 

한겨레 한승동 기자기자블로그



» 〈시대의 불침번〉



〈시대의 불침번〉
정경모 지음/한겨레출판·1만8000원

정경모(86). 언젠가 한국 역사는 1970년 9월 유효기간 6개월짜리 여권을 손에 쥐고 일본으로 떠난 뒤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이 40년 망명객의 시선으로 재조명될 날이 올지 모른다. 그것은 지금 대한민국 다수에게는 낯설고 충격적일 수도 있다.

그가 자서전 <시대의 불침번>을 냈다. 책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저항’이다. 주류 세계에 대한 거부이며 전 생애를 건 요지부동의 싸움이다. 저항의 화살은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패권세력, 그리고 그들과 손잡고 자민족을 비참으로 내몬 대가로 영달해온 조국의 매판세력 내지 부역세력을 겨냥하고 있다. 정경모를 알려면 이것부터 살펴야 한다.

‘냉전의 설계자’ 조지 케넌이 미국 국무부 외교정책기획실장 시절 작성한 ‘설계도’ 중의 일부는 이렇다.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생각한다면 일본의 영향력과 제반 활동이 조선에서 만주에 이르는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에 대해 미국이 반대할 이유가 없게 될 날은 반드시 올 것인데, 그날은 우리 예상보다 더 빠를 수도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소련의 압력을 완화하고 저지하기 위해서는 이것만이 현실적인 유일한 방도인 까닭이다. …다시 한번 이러한 정책을 채용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바람직하다는 것이 우리의 일치된 견해다.” 전범국 일본을 동아시아 냉전 교두보로 재건해서 한반도와 만주일대를 다시 그 지배 아래 두도록 하자는 케넌의 생각은 그대로 실현되진 않았지만 기본전략은 오늘까지 유지되고 있다고 정경모는 생각한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표현에 따르면 한국은 일본 방위를 위한 전초기지일 뿐이다. 6·25전쟁 직전인 1950년 6월6일 존 포스터 덜레스 미 외교고문(나중에 국무장관)은 “미국은 일본인이 중국인이나 조선 사람들에게 품고 있는 우월감을 십분 이용할 필요가 있다. 공산진영을 압도하고 있는 서방 쪽 일원으로서 자신들이 동등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일본인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메모를 남겼다. 전형적인 이이제이다. 미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휘하 장병들에게 “조선인들은 미국의 적”으로, “일본인들은 우리의 우호국민으로 간주한다”는 통고문을 보냈다. 한반도를 분단한 미국 군대는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온 것이다. 한국전쟁은 이미 그때 시작됐거나 예정됐다는 것이 브루스 커밍스의 생각이며 정경모도 동의한다. 정경모의 시선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도 같은 해에 일어난 이란혁명과 팔레비 비밀경찰 간부들 처형, 미국대사관원들 인질 사태가 야기한 미국과 한국 권력자들의 위기의식과 연관지어 해석한다.




» 정경모(86)



미국의 냉전전략에 편승한 일본은 미국과 찰떡궁합이 돼 한반도를 능욕했다. 한국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참가자격 박탈에 앞장섰고 독도 문제를 만들어낸 총리 요시다 시게루는 “이토 히로부미의 길을 따라” 다시 한반도를 차지해야 한다고 공언했고, “한국인은 원래 무지몽매한 백성이며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 했던 외무성 아시아국장 기우치 아키타네는 “일본이 장기판의 장이라면 한국은 그것을 지키는 상”이라고 뇌까렸다. 박정희를 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으로 추어올렸으며 그의 장례식에 일본대표 조문객으로 왔던 기시 노부스케가 주도한 자민당 55년 체제는 케넌 설계도의 구현체였으며 기시의 외손자 아베 신조, 요시다의 손자 아소 다로가 꿈꿨던 일본의 ‘보통국가’화 등 오늘날 동아시아를 규정하는 정세구도도 “케넌 설계도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고 정경모는 본다. 정경모가 파악한 일본역사의 진실은 “비류백제의 후손이 서기 396년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오진 천황이 됨으로써 일본 황실과 국가 자체의 기원을 이루었다”는 것인데, 일본 우파 지배자들은 침략을 정당화하려고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자국민과 서양인 뇌리에 각인시켰다.

정경모를 망명으로 내몬 것은 미국·일본의 그런 신식민주의 전략에 빌붙어 아무런 민족적 비전도 없이 단물만 빨던 한국 권세가들의 한심한 작태에 대한 분노와 환멸이었다. 일본 게이오대학 의학부와 서울대 의대, 미국 에머리대에서 공부했고, 한때 이승만 장학금도 받았으며, 도쿄의 맥아더 최고사령부(GHQ)에서 문익환, 박형규 등과 함께 근무하면서 한국전쟁 휴전회담 때 미군 통역업무를 맡기도 했던 그는 미군조차 썩어빠진 친일파 인간 쓰레기들만 쓸어모았다고 욕한 이승만, 관동군 장교로 복무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뒤 비슷한 길을 걸은 박정희와 그 친일·친미주의 후예들의 행각을 사정없이 비판한다. 판문점 포로교환 관련 회의에 한국군 옵서버로 파견됐던 유재흥 중장 얘기는 놀랍고도 쓰리다. 일본육사 26기 친일파 유승렬 대좌의 아들로 일본육군유년학교 시절부터 일본인으로 교육받은 유재흥이 장군으로 출세해서 미군 주도 아래 영어로 진행되는 회의에 한국군 파견 옵서버로 파견되고, 자신이 대표한 나라의 말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 채 일본말 통역사에게 기대야 했던 희극적 상황이야말로 사태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드러내지 않는가. 평균적인 한국인들에겐 “설마!” 싶은 그런 충격적인 장면들의 연속으로 비칠지도 모를 <시대의 불침번>은 한국사의 잃어버린 고리들을 채워주는 귀중한 증언일 수 있다.

이런 내용이 딱딱한 증언집이나 역사 에세이로 끝나지 않은 것은 풍성한 일화들이 지은이의 일인칭 체험들과 얽혀 있고 또 특유의 구수한 구어체로 기술돼 있기 때문이다. 타협을 거부한 그의 “완강한 고독이 불의와 굴종으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불명예를 씻어내는 데 크게 일조했다”고 한 백낙청 교수의 평이 의미심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