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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작의 형과 노무현 정부

I T69 U 2012. 11. 3. 02:00

경제에 대한 인식의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음은 누군가의 지적이 아니라도 언제나 통감하는 바이며 결단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경제에 대한 고도의 혜안과 안목으로 다뤄진 글을 읽게 되면 나도 모르게 탄식과 함께 경외감을 피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글은 前 노무현대통령의 바보같은 경제운용에 대한 해설이 돋보이는 글이 있어 그 분을 추억하는 자로서 의미있는 글이라 생각되어 포스팅하고자 한다.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내 주변의 등장인물들에 대하여 정확히 彼我를 구분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편이다.

예컨데 여성들 중에 정말 자신을 위해주기에 충분한 아군을 몰라보고 흐릿한 사기꾼의 농간에 정신줄 놓는 경우를 접하게 되면 한심함을 넘어 경멸하게 된다.

세상 어떤 일이라도, 돈이 똥구멍에서 댐빌 정도의 천하의 부자라도 자신 스스로가 대처해야 할 사안들은 무지기수다.

자기 앞가립이 바르지 못하고 누가 내게 도움이 되는 의견을 말해주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사실 개인적인 의견으로 당해도 싸다고 생각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사사로운 이익에 눈이 멀어, 지 살을 도려가도 그게 무엇이었는지, 그래도 되는 건지, 도대체 사리분간을 못하는 개한망국의 천민들을 보면 그렇게 내가 경멸해 마지 않을 졸렬한 군상이자, 당해서 싸고 오지고 꼬시다고 생각한다.


탐욕이 난무하는 이 저급해질 대로 저급해진 이 나라에 구걸구걸하여 매달릴 뿐인 존재 주제에 도대체 다른 가치가 존재나 할 일인가?


각설하고 주제파악도 못하는 종자들이 가신 분을 주댕이로 훼손하는 패륜아라도 한번 쯤은 정색을 하고 아래의 글을 정독해주기를 덧없는 바램일지라도 바래본다.





----------------------------------------이하 해당 게시글----------------------------------------



편작의 형과 노무현 정부

세일러

2012.11.02 09:27


우리나라의 저축률 추이 표를 다시 올립니다.

 

(출처: 한국은행의 자료를 필자가 가공)

 

 

표에서 정부의 저축률 추이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상황이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보일 합니다.

 

 

 

(출처: 한국은행의 자료를 필자가 가공)

 

 

그래프를 보면 정부의 저축률이 9% 넘어가던 시기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뿐이라는 사실을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것은 지난 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국민연금의 영향이 가장 큽니다. 국민연금이 본격적으로 걷히기 시작했으면서도, 지급은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가 정부 10 동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정부의 저축이 ‘강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경제성장에 문제가 생깁니다. 노무현 정부의 경우 국민연금 강제저축으로 인한 경제성장률의 손실이 -1.7%P 이르렀습니다.

말은 국민연금의 강제저축이 없었다면 노무현 정부 시기동안 경제성장률은 5년동안 실제로 실현했던 경제성장률보다 매년 1.7%P 높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김대중 정부의 경우도 경제성장률의 손실폭이 상당할텐데 시기의 통계수치를 구할 수가 없어서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동안 경제정책당국이 처했던 근본 고민은 98년의 경제위기 후유증을 극복하는 문제 외에 국민연금의 강제저축으로 인한 경기침체효과가 매우 크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정부 10 동안의 경제정책과 성과를 제대로 이해할 없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 야당의 발언 내용을 보면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같더군요…)

 

다음은 지난 세월동안 우리나라의 통합재정수지와 관리대상수지 추이를 보여주는 그래프입니다.

 

 

 

(출처: 기획재정부의 자료를 필자가 가공)

 


이를 보면 김영삼 정부 이전의 역대 정부는 통합재정수지(파란색) 마이너스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정부가 재정을 동원하여 경기부양책을 펼쳐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김영삼 정부 이전에 통합재정수지가 흑자를 보였던 경우는 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 시절 3(저달러, 저금리, 저유가)효과로 인한 무역수지 흑자와 국내의 건설경기 호황이 겹쳐서 경기가 과열양상을 빚던 시기가 유일합니다.

 

그러다 김영상 정부 이후로는 1998년의 경제위기와 2008년의 경제위기 시를 제외하면 파란색 통합재정수지가 줄곧 흑자를 보이고 있습니다. 바로 국민연금제도가 새로 도입됨으로 인해 강제저축 효과가 발휘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점부터 정부에서도 파란색의 통합재정수지 외에 분홍색의 관리대상수지를 별도로 집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연금의 강제저축 효과 때문에 파란색의 통합재정수지 만으로는 정부의 재정건전성 여부를 제대로 파악할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점부터는 파란색의 통합재정수지와 분홍색의 관리대상수지를 서로 비교해보면 정부의 경제정책 대응이 어떠했는지를 있습니다.

 

김영삼 정부의 경우는 파란색의 통합재정수지가 흑자(강제 저축) 보이자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재정지출 확대) 동원해서 이를 상쇄시켰습니다. 때문에 분홍색의 관리대상수지는 마이너스를 보이고 있습니다.

 

당시는 이전 정부인 노태우 정부 당시 경기가 과열 양상을 보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정책당국자와 경제 전문가들이 ‘연착륙’ 필요성을 언급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하필 자기 임기때 연착륙 시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어했지요.

 

결과 당시 ‘신경제 정책’이라 불리던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바로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입니다.

결과 모두가 한국경제의 연착륙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예상과 달리 한국경제는 여전히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이게 됩니다. 그에 따라 주식시장도 호황을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었지요. 97년말 IMF 구제금융 신청…

 

다음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는 파란색의 통합재정수지가 유달리 높은 수준의 흑자를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드린 국민연금의 강제저축 효과가 정부 시기에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명박 정부 기간에도 흑자를 보이고 있지만 이전 10 동안에 비하면 흑자폭이 낮아졌다는 사실을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대응책이 어떤 것인지는 분명합니다.

통합재정수지의 흑자를 상쇄시키기 위해서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분홍색의 관리대상수지가 폭의 마이너스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역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 동안입니다.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해에 분홍색의 관리대상수지마저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통합재정수지가 막대한 흑자를 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써서 관리대상수지는 적자를 만들어도 괜찮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이에 대한 강만수 장관의 평을 들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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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수 재정 "감세·재정투입 '쌍끌이'…경기 살리겠다" 한국경제 2008.04.15

 

지난해(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 무려 153000억원의 세계잉여금을 남긴 재정은 국내 경기의 활력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요인이었고, 재정의 부정적 역할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감세뿐만 아니라 재정지출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
다른 나라들은 적자 재정을 운영하면서까지 민간의 활력을 높이려고 노력하는 반해 우리나라는 오히려 막대한 재정 흑자를 남겨 민간부문을 위축시키고 있다" 최근의 '흑자' 재정을 균형 또는 소폭 적자로 바꾸겠다 뜻을 분명히 했다.

 

세계잉여금 14 안받았으면 성장률 1%p 상향[강만수장관]  연합인포맥스 2008.09.03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작년 14조원 세계 잉여금 받지 않았으면 성장률 1%p 높아질 것으로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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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잉여금’이란 정부가 쓰지 않고 남긴 예산을 다음 정부에게 넘겨준 돈을 말합니다.

노무현 정부는 임기 마지막 해에 경제성장률을 1%P 끌어올릴 있던 돈을 사용하지 않고 남겨서 다음 정부인 이명박 정부에게 넘겨줬던 것입니다.

이는 경제성장률 1%P 다음 정부에게 넘겨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의 경제성장률은 5.10% 였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5 내내 경제성장률이 부진하다는 이유 때문에 혹평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런 노무현 정부가 경제성장률을 1%P 끌어올릴 있던 돈을 사용하지 않고 남겨서 다음 정부에게 넘겨줬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오히려 다음 기사에서 보듯이, 예산을 남기지 말고 철저히 집행해서 경제성장률을 높이라고 지시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이월·불용 예산 없도록 예산 철저히 집행" YTN 2012.10.23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는 5 내내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을 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경제성장률이 부진하다는 혹평에 5 내내 시달렸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경기부양책을 번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차트에서 보시는 것처럼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없었던 규모로 통합재정수지 흑자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경기부양책을 사용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었을 텐데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사용하자는 경제관료들의 요청이 빗발치고 있었는데도 결국 경기부양책은 노무현 대통령 임기중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나 주목할 사항은 2003-4 카드사태에 대한 대응 과정입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98년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내수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 신용카드 발급과 사용을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신용카드사들은 신용부실자들에게까지 카드 발급을 남발하게 되었습니다.

 

앞에 제시해드린 표를 보시면, 가계 저축률이 3.1% 기록해서 가장 낮았던 해가 2002년입니다. 이는 당시가 신용카드 현금서비스가 절정을 보였던 해여서 그런 것입니다.

그에 따라 민간소비가 호조를 보여서 경기는 아주 좋았습니다.

바로 뒤이어 터지는 2003-4년의 카드사태를 예비했던 해라고 있지요.

 

결국 카드 발급 남발은 결제대금 연체율이 치솟아서 신용카드사의 부도위기로 귀결됩니다.

당시 1위업체였던 LG카드는 결국 산업은행이 인수해야 했지요.(이후 신한은행으로 넘어감)

 

과정에서 신용카드사들이 발행했던 카드채들이 폭락하면서 금융권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신용경색 발생).

실물경제 측면에서는 신용카드 연체로 인해 수백만명의 신용불량자가 발생하면서 내수소비가 꽁꽁 얼어붙게 됩니다.

 

98년의 위기를 수습하는가 했는데, 한국경제가 다시 한번 위기에 봉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카드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는 부실을 한꺼번에 모두 털어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카드사용자들에게 방만하게 주어졌던 신용한도( 사용 가능액, 현금서비스 한도 ) 합당한 기준에 따라 원칙대로 축소시키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당시 경제관료들은 부실 부분을 조금씩 뒤로 미루면서 점진적으로 해소해나가고, 경기부양책을 병행해서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줄이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와 같은 의견은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아파트 가격 급등을 억누르기 위해 은행의 담보대출금액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 LTV DTI 제도까지 마련했던 시기입니다. 그에 따라 은행의 담보대출 증가율이 주춤하면서 역시 경기에는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다면 신용카드의 부실은 뒤로 미루면서 점진적으로 처리해나가는 길을 선택할 법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노무현 정부 5년간은 철저하게 경기침체를 ‘감수’하는 것으로 일관했다고 있습니다.

역대 다른 정부가 했던 만큼만 경기부양책을 사용했어도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기부양책은 철저하게 배격하는 것으로 일관했습니다.

과연 그랬을까?

이와 같은 의문점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2004 노무현 정부 시절 처음으로 도입된 ‘재정전략’회의가 주목됩니다.

이는 짧게는 다음 해의 정부 예산 편성 지침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이고, 길게는 중장기적인 재정전략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처음으로 ‘재정전략’을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앞으로 세계적으로 국가의 재정전략이 매우 중요해질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등에서 국가의 재정전략이 잘못되었을 어떤 일들이 벌어질 있는지 ‘예고편’ 정도를 보고 있습니다.

 

본편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본편이 본격적으로 상영되기 시작하면 가서야 국가의 재정전략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것으로 봅니다.

 

이와 같은 시대를 앞두고 노무현 정부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재정전략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은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고 있습니다.

 

국가의 ‘재정전략’이라는 관점에서, 앞에 제시해드린 우리나라의 저축률 추이 표를 다시 필요가 있습니다.

표에서 노무현 정부 5년간(2003-2007) 다시 보면, 이전 정부들에 비해 가계의 저축률이 현격하게 떨어졌던 시기라는 사실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국가의 ‘재정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시는 가계가 적극적으로 대출을 확대하고 있으므로 정부는 대출을 줄여야 합니다(저축률을 높여야 합니다).

 

가계가 이처럼 급격하게 대출을 늘리면, 결국 나중에는 부실대출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없습니다.

요즘 ‘가계부채’가 과다하다는 점이 연일 문제로 부각되고 있지요. 결국 가계부채 중에 부실한 대출들이 문제로 터지게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가계는 그동안에 확장시켰던 대출을 갚기 위해 급격하게 저축을 하지 않을 없게 됩니다.

 

바로 정부가 가계의 바톤을 이어받아서 대출을 확대(=경제에 신용 공급)시켜주어야 경제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있습니다.

때를 대비해서 정부는 미리 저축을 늘려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시에 아파트버블을 잡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습니다.

항상 일본의 부동산 버블 붕괴와 비교하며 비슷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경계했었지요.

 

결국 우리나라에서도 아파트버블 붕괴가 찾아올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경제위기가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정부의 재정지원 소요가 크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일본의 사례를 보면 명약관화하니까요.

 

결국 노무현 정부 5년간은 철저하게 국가의 ‘재정전략’이라는 관점 하에 미래의 경제위기를 대비하여 국가의 재정여력을 비축한 시기라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경제성장률 1%P 포기하면서까지 다음 정부가 있도록 세계잉여금을 14조원 넘게 넘겨줄 정도였으니까요.

 

노무현 대통령은 항상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었지요.

그에 따라 국가재정 역시 시스템 하에서 움직일 있게 당시에 ‘국가재정법’을 제정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가재정법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 만들어져서 2007년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국가재정법에서는 정부가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무분별하게 ‘감세’를 남발하여 국가재정을 취약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세감면율 상한선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스템은 결국 이명박 정부에서도 제대로 작동했습니다.

 

MB 감세정책 발목 잡는 '노무현 흔적' 오마이뉴스 2009.05.29

 

무모한(?) 감세정책…"MB정부 '위반했다" 조세일보 2012.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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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에서는 결국 국가재정법의 상한선을 근소하게 어겼습니다만,

그래도 실정법이 정해져 있다보니 야당의 강력한 공격을 받게 되어 상한선을 터무니없이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국가재정법이라는 시스템이 노무현 정부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이명박 정부의 감세폭은 훨씬 컸을 것이고, 그에 따라 지금 우리나라 국가부채는 훨씬 늘어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노무현 정부는 국가재정법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둠으로써 다음 정부에서 무분별하게 ‘감세’를 남발하여 국가재정을 취약하게 만드는 것을 막았고,

대신에 자신이 아껴서 남긴 돈을 대신 있도록 세계잉여금으로 넘겨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명박 정부는 철저하게 노무현 정부가 미리 짜놓은 안에서 움직여왔다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시스템의 힘이라고 있겠지요.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고 당장 뭐가 되는 같진 않지만, 두고 두고 미래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人無遠慮 必有近憂

인무원려 필유근우

사람이 멀리 내다보는 고려가 없으면, 항상 가까운 근심꺼리에 시달리게 된다.

 

노무현 정부를 보고 있으면 위의 말이 생각납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는 세계 경제가 좋았던 시절입니다. 때문에 우리나라 수출이 잘되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아파트 버블로 부동산 경기가 좋던 시절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경기부양책까지 동원했으면 경제성장률은 훨씬 높아졌겠지요.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나중을 내다보고, 형편이 좋을 힘든 구조조정을 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카드사태의 부실을 단번에 모두 정리한 조치가 그것입니다.

이는 단지 신용카드회사에 관한 문제만이 아닙니다.

 

당시 우리나라 금융기관과 민간 소비자들에게 생겨난 ‘방만함’을 일거에 정리한 것입니다.

당시 카드채가 폭락하는 충격을 겪으면서 이전까지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이 채권을 인수하면서 지녔던 안일한 태도가 일소되었습니다.

은행들은 수백만명이나 한꺼번에 생겨난 신용불량자를 관리하면서 고객의 신용관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소비자들 역시 자신의 신용관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국내의 은행과 소비자들이 ‘신용관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운 것은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때의 경험을 거쳤기 때문에 지난 2008년의 위기를 겪고도 지금까지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괜찮은 것입니다.(뭐가 괜찮냐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이제 조금만 두고 보시면 지금까지가 상대적으로 괜찮은 상태였다는 것을 느끼게 것입니다.)

 

만약 2003-4년에 부실을 뒤로 미루는 방식으로 흐지부지 넘겼었다면,

우리나라 금융시장은 2008년의 금융위기로 인해 이미 무너져내렸을 것입니다.

 

요즘 다시 신용카드사들의 무분별한 카드 발급 문제가 슬슬 언론에 보도되는 다시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탐욕’의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카드사태를 겪은지 10년도 안됐는데 벌써 다시 이러고 있습니다.

만약 2003-4년에 철저하게 카드부실을 일소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땠을까요?

 

당시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은 기름기를 뺐다고 있습니다. 물론 부동산 대출 부실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부분을 제외한 다른 부분들의 방만함이 모두 제거되었다는 것은, 지금 경제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덕택에 노무현 정부는 당시 경기침체를 겪어야 했고 경제성장률 부진으로 혹평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부양책의 유혹을 철저하게 거부했고 미래를 위해 정부의 저축을 쌓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앞서 강만수 장관의 말을 다시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적자 재정을 운영하면서까지 민간의 활력을 높이려고 노력하는 반해,

우리나라는 오히려 막대한 재정 흑자를 남겨 민간부문을 위축시키고 있다"

최근의 '흑자' 재정을 균형 또는 소폭 적자로 바꾸겠다”

 

다른 나라들은 형편이 좋던 시절에 적자 재정을 운영한 결과 아래와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국민경제에 태풍이 들이닥쳐서 국민들을 위한 가림막도 치고 해야 하는데, 돈이 떨어져서 어떤 조치도 취할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강만수 장관은 이전 정부가 세계잉여금을 14조원 넘게 넘겨준 덕분에 감세정책을 쓰면서도 동시에 확장적 재정정책을 모두 사용할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경기부양책 실시하고도 재정에 부담이 없었습니다.

 

강만수 장관 역시 속으로는 노무현 정부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명박 정부는 5 내내 적자재정을 써왔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국가부채 비율은 여유가 있습니다.

다음 정부 5년간도 줄곧 적자재정을 사용해야 것입니다.(공황이 심화될 것이므로)

그래도 우리나라 국가부채 비율은 버틸만 합니다.

 

이유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간 정부저축을 늘려왔기 때문입니다.

덕에 다음 정부들은 10년간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써도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김대중 정부는 IMF 경제위기라는 초유의 국난를 당하여 이를 극복하느라 힘을 쏟았고,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부실꺼리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김대중 대통령도 비슷한 취지의 사과를 적이 있지요)

노무현 정부는 IMF 경제위기 극복과정에서 생겨난 부실꺼리들을 모두 자신의 임기 내에 떠안고, 다음 정부들이 닥쳐올 위기에 대비할 있도록 예비해주었습니다.

 

앞으로 공황이 심화되면 세계 각국은 국가의 재정을 동원한 ‘살아남기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위기의 순간 속에서도 국가의 통합을 유지해내고 성장잠재력을 보존해내기 위한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국가의 역량을 망가뜨리지 않고 보존해내는 나라는 공황이 지나갔을 , 이후 경제성장을 통해 승자가 됩니다.

이와 같은 경쟁에서 우리나라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출발선에 있습니다.

 

 

"큰형님은 사람들이 느끼기 전에 이미 병을 고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병을 고쳤는지도 모릅니다
둘째 형님은 병증을 초기에 다스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벼운 병을 치료하는지 압니다
저는 재주가 모자라 병이 들고 나서야 조치를 취하므로 사람들은 제가 제일 뛰어난 아는 것입니다."

 

노무현 정부를 보면 편작의 증언이 연상되는 이유입니다.

 

 


 



편작(扁鵲)



지금부터 2415 년전 중국 동부지역(현재 산동성)에 반짝 반짝 빛나는 하나의 큰별이 떠올랐다. 그별은 바로 편작(BC 407-BC 311)이었다.

편작은 의료활동과 의학서적 편찬에 일생을 바쳤으며 후세 중국 의학의 이론체계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의완(醫緩)과 의화(醫和)는 춘추(春秋)시대(BC 770-BC 403) 진(秦)나라의 양의(良醫)이며 편작은 전국(戰國)시대(BC 403-BC 221)의 양의라고 말한다.

사실 편작은 춘추시대 말기로 부터 전국시대 초기에 걸쳐 활동한 의사이다. 편작은 실제 이름은 아니다. 원래 편작은 원시 시대 말기 황제시대에 사람들로 부터 추앙받던 고명한 의사의 이름이었다. 후세 사람들이 편작을 양의(良醫)의 존칭으로 사용했다.

황제시대(BC 2697-BC 2597)는 신석기시대 후기를 말한다. 황제의 성은 공손(公孫)이며 이름은 헌원(軒轅)이었다.

편(扁)자는 편(遍)자와 통하고 작(鵲)은 희작(喜鵲)을 칭하며 길상지조(吉祥之鳥)를 의미한다. 즉 "까치" 를 일컫는다. 까치가 짓는 것을 보면 운수가 좋을 징조이며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전국시대의 편작은 의술이 정밀하고 뛰어났다.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백성들을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수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제시대의 편작을 전국시대의 편작과 연관시켜 진월인(秦越人)을 편작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진월인을 편작이라고 부르다보니 진월인은 편작이 되고 말았으며 편작 이후에 더 훌륭한 의사가 나왔더라면 진월인이 편작의 이름을 빼았겼을 것이다.

진월인은 제(齊)나라 여읍(廬邑:현재 산동성 제남 장청현(長淸縣))이라는 고장에서 일개 보통 평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읍은 서주(西周) 시대 일개 강씨(姜氏)성의 소국(小國)이었다. 진시황이 6 국을 통일한 후 현(縣)으로 되었다. 편작은 여읍지방 사람이므로 여의(廬醫)라고도 칭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진월인은 발해군(勃海郡) 막주진(막州鎭)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이곳은 현재 하북성 임구현(任邱縣)이다.

편작의 큰형의 이름은 신시(神視)이며 둘째형은 신호(神毫)였다. 두 형님들도 모두 행의를 생계의 수단으로 삼고 살았다. 진월인의 다른 이름은 신응(神應)이다.

진월인은 청년시절에 어느 여관의 관리인을 하고 있었다. 진월인은 모든 손님들을 VIP로 모시고 주도면밀하게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머무는 손님들마다 진월인에게 호감을 가졌고 신뢰하였다.

어느 날 장상군(長桑君)이란 노인이 이 여관에 머물었다. 진월인은 이 노인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어리둥절해 졌다. 이 노인은 하얀 눈썹과 수염을 갖고 있었으며 정신이 초롱초롱 했으며 선풍지골(仙風之骨)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풍채가 뛰어나고 행동과 모습이 말쑥하고 멋스러웠으며 시원스러웠다. 진월인은 그 노인을 보통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그 노인을 정중하게 잘 모셨다. 그리고 노인을 대할때 항상 예의를 갖추어 대하였다.

그후로부터 이 노인이 여관에 머물때 마다 한결같이 VIP로 모셨다. 벌써 장상군이 진월인의 여관에 드나든지 십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십년동안 장상군은 진월인을 자세히 관찰하며 지켜보았다. 그리고 장상군은 진월인이 자기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보통 청년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장상군은 또 진월인이 보기드문 좋은 청년이라는 것과 학문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다.

어느 날 장상군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자기 방안에서 진월인과 밀담을 하였다.

 

장상군은 "나는 수 십년 동안 행의를 하며 전국 각지로 돌아다녔다. 나는 이제 나이가 많으므로 나의 일생동안 경험해 온 의사금방(醫事禁方)을 네에게 전해 주겠다. 너는 나의 뜻을 이해하며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겠느냐? 그리고 너는 이 비밀을 세상에 폭로하면 절대로 않된다." 고 진월인에게 말했다.

진월인은 이상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기뻤다. 그리고 진월인은 장상군에게 큰절을 하며 "제가 죽을때 까지 연구해도 다 하지 못할 의술을 제에게 전수해 주신다니 어찌 원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의 분부를 잘 지키겠으며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고 대답하였다. 장상군은 머리속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의학지식과 함께 모든 의술을 진월인에게 전해주고 비밀히 간직하고 있던 의서(醫書)를 진월인에게 전해 주었다.

장상군은 말을 마치자마자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사기의 편작전에 보면 "장상군은 가슴속에서 약물 한포를 진월인에게 주며 매일 아침 상지수(上池水)로 삼키라고 말했다. 땅속에서 나오는 물을 사용하지 말고 이슬로 복용해야 된다고 말했다. 30 일 동안 매일 복용하고 나면 통찰력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상지수는 로수(露水)를 일컫는다. 진월인은 장상군이 준 약봉지를 보물처럼 손에 받아들었다.

매일 밤 그릇을 집밖에 놓아 두고 밤이슬을 그릇속에 받았다. 그리고 장상군이 준 약가루와 이슬을 혼합해서 복용했다. 진월인은 장상군의 말대로 30 일 동안 그 약을 열심히 복용했다. 과연 진월인에게 기묘한 변화가 일어나서 벽을 뚫고 벽건너편에 있는 사람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생겼으며 진월인의 식견은 넓어지고 높아졌으며 예리해 졌다. 사람을 쳐다보기만 해도 그 사람의 체내에 들어있는 5장 6부를 투시해 볼 수 있는 능력과 질병의 소재까지 진찰해 낼수 있었다.

진월인은 10 년간 장상군의 비전(秘傳)을 모두 습득하였으며 스스로 의술을 갈고 닦아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반복해서 다방면의 환자들을 치료하는 동안 임상경험을 통하여 병마와 싸우는 빈한한 백성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진월인은 도인(導引:체육요법)과 토납(吐納:호흡운동)과 기공(氣功) 등 각종 건신거병법(健身祛病法)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다. 진월인의 의료기술은 일취월장하였으며 완숙하여졌다.

진월인은 중년 이후부터 제자들 중에서 자양(子揚)과 자표(子豹)를 데리고 열국을 순방하며 자신의 정밀하고 뛰어난 의술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어디를 가던지 가는곳 마다 진월인은 성심성의껏 환자들을 돌보아 질병을 치료하였다. 고치기 힘든 어려운 질병들도 치료하였다.

전국책(戰國策)과 한비자(韓非子)와 회남자(淮南子)와 사기와 열자(列子)와 한시외전(韓詩外傳)과 설원(說苑) 등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진월인은 제(齊)나라와 진(晉)나라와 주(周)나라와 진(秦)나라와 괵국(괵國) 등지 에서 가는곳 마다 귀신과 같이 치료하고 정확한 진단으로 치료효과가 탁월했으며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위로는 왕공귀족(王公貴族)으로 부터 아래로는 가난한 백성들에 이르기 까지 진월인을 칭찬하는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진월인은 행의 사상 환상적인 전기(傳奇)를 창조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진월인은 가는곳 마다 귀빈 대접을 받았으며 사람들은 이때부터 진월인을 편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부터 신의라는 영예를 얻었다.

편작이 열국을 순회하며 행의할 때 맨먼저 도착된 곳은 진(晉)나라였다. 그 당시 진나라의 정권을 쥐고 있는 대신(大臣) 조간자(趙簡子)가 중병에 걸렸다. 어의들도 조간자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진나라 의학계의 대가들도 치료 방법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을때 편작선생이 진나라에 도착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즉시 편작을 초청하여 조간자를 진찰하게 했다. 편작은 진맥부터 시작했다. 조씨 가족들은 "조간자의 병을 치료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겠느냐?" 고 편작에게 물었다. 편작은 편안한 말로 "당신네들은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3 일 후면 깨어날 것입니다." 고 태연하게 말했다. 조씨 가족들은 편작의 말을 반신반의하였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집주인 양반이 무슨 병에 걸렸습니까?" 하고 편작에게 물었다. 편작은 "병이 지금 혈맥에 있오. 예전에 진목공(秦穆公)이 걸렸던 병과 똑같은 병이오. 목공도 7 일 간 혼미상태에서 있다가 깨어났오. 목공이 깨어나서 공손지(公孫支) 대신과 자여(子與) 대신에게 "과인이 며칠동안 옥황상제를 만나 매우 기뻤었다. 그런데 상제께서 나에게 "진(晉)나라에 앞으로 큰 난리가 날 것이다. 5세(五世) 동안 편치 못할 것이다. 그후 패권을 쥐게될 것이다." 고 말했다." 고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공손지는 진목공에 대한 말을 듣고 기록해 놓았다. 후에 헌공지난(獻公之亂)이 있었고 문공(文公)이 중원의 패권을 쥐었고 양공(襄公)때 세상이 어지러웠다. 진목공이 7 일간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나서 한 말대로 세상이 돌아갔오.

편작은 "당신 주인의 병은 목공의 병과 똑같소. 나의 진찰에 의하면 3 일 내에 그는 깨어날 것이며 깨어나서 목공이 한 말과 비슷한 말을 할 것이오. 당신들은 안심하고 기다리시오" 라고 조씨 가족들에게 말했다.

이틀 반이 지나갔다. 조간자는 과연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조간자는 대신들에게 "며칠동안 나는 옥황상제를 만났다. 백여명의 신(神)들과 함께 가무를 즐겼으며 모두 성색(聲色)에 취해 있었다. 구경 잘 하고 기분이 상쾌했으며 매우 즐거웠다. 홀연히 큰 곰이 나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옥황상제는 나에게 활을 쏘아 곰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화살통 속에서 화살을 한개 끄집어 내어 활에 걸고 힘껏 곰을 향하여 활을 잡아당겼다. 곰은 내가 쏜 화살에 맞아 숨졌다. 또 한마리의 곰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또 활을 쏘아 곰을 죽였다.

옥황상제는 내가 두마리의 곰을 모두 적중시켜 죽이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옥황상제는 나에게 두개의 보물상자를 하사하고 사냥개 한마리를 선물로 주었다. 동시에 옥황상제는 "진(晉)나라 국세가 점차 약해질 것이며 7 세(世) 후에 망할 것이다" 고 말했다.

진나라 대부(大夫) 동안(董安)은 조간자가 말하는 것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동시에 편작이 일전에 말했던 것을 조간자에게 알려 주었다. 조간자는 토지 4 만무(畝)를 편작에게 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편작을 신의로 모시라고 말했다.

사마천의 사기 중 편작열전에 보면 "조간자우사급명의편작전사만무(趙簡子又賜給名醫扁鵲田四萬畝)"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조간자는 명의 편작에게 4 만무의 땅을 하사하였다." 는 뜻이다. 4 만무의 땅은 현재의 계산방법으로 환산해보면 132 만 평에 해당되는 넓은 땅이다. 약 1100 에이커 쯤 되는 땅이다.

후에 진(晉)국은 정공(定公)후 출공(出公),애공(哀公),유공(由公),열공(列公),효공(孝公),정공(靜公)을 거쳐 과연 정공 2 년에 진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조간자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칠세망국(七世亡國)" 이라고 말한 예언이 딱들어 맞았다.

편작이 열국행의 중 두번째로 들어간 나라는 괵국(괵國)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죽은 사람과 똑같은 시궐병(屍蹶病)에 걸린 괴국태자를 살려냈다.

그 다음 편작이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에서 제환후(齊桓候)의 얼굴색을 보고 병정을 예측했다는 고사들은 만세에 유전하는 신기한 병안(病案)들이다.

이상과 같은 고사들은 그 당시 세상에 전해 내려오며 칭송되던 전설임과 동시에 역대 명의들이 탄복하던 바였다.

최후로 진월인은 진(秦)국 수도 함양(咸陽:현재 섬서)에 도착되었다. 진(秦)나라 의약국(醫藥局)을 주관하는 태의령(太醫令) 이혜(李醯)는 역사에 치욕적인 사건을 만든 인격이 낮은 비열한 장본인이었다. 이혜는 진월인의 명성이 온 천하에 드높아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왜냐하면 진월인 때문에 임금으로 부터 자신에 대한 총애를 잃어버리게 될 것은 물론 관직을 잃을 까봐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혜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편작의 실력에 미치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혜의 가슴속에는 진월인에 대한 적대심과 증오감으로 꽉차 있었으며 기회를 포착하여 진월인을 제거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진무왕(秦武王)의 얼굴에 옹절(癰癤)이 생겼다. 양쪽 귀앞 부분과 두눈 아래에 크나큰 옹절이 생겨 매우 보기 흉했으며 오랫동안 어의들도 치유하지 못했다. 진무왕의 통고는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진무왕은 진월인이 함양에 도착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사신을 파견하여 진월인을 궁안으로 초청했다. 신하들이 진월인을 데리고 왕앞으로 갔다.

진월인은 진무왕을 진찰하였다. 진월인은 진무왕을 보자마자 이미 마음속에 전반적인 치료계획이 서 있었다. 진월인은 "수술 칼로 환부를 찢어야 합니다." 고 진무왕에게 아뢰었다. 진월인이 하는 말을 임금 옆에서 듣고 있던 신하들은 서로 의견이 분분하였다. 왜냐하면 진무왕의 옹절이 귀옆에 있으므로 만약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귀머거리가 될 수도 있고 옹절이 눈밑에 있으므로 잘못하면 장님이 될 수도 있는 후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월인은 신하들이 논쟁하는 것을 듣고 몹시 화가났다. 신하들이 "진월인은 더 할수 없이 높고 더 없이 존귀한 진무왕을 보살필수 없다." 고 하는 말을 진월인은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진월인은 진무왕에게 단도 직입적으로 "의학상으로 볼때 나는 내행인(內行人)이며 대신들은 외행인(外行人)입니다. 질병을 치료할 때는 내행인과 상의하고 의논해서 결정해야지 외행인들의 말과 느낌으로 결정해서는 않됩니다. 내행인은 전문의사이며 저들은 전문의들이 아닙니다. 만일 이번에 폐하께서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주저하고 망설이면 병이 치유되지 않을뿐만 아니라 더 이상 국정을 보살피기 어려울 것입니다." 고 아뢰었다.

혈기 왕성한 20 여세의 진무왕은 진월인이 하는 말을 듣고 난처하고 놀라서 멍하니 앉아서 눈만 크게 뜬 채 말을 하지못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후에 진무왕은 진월인이 계속적으로 수술하자는 말을 듣고도 진월인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 가지고 있던 진월인에 대한 호감은 진무왕의 마음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한쪽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던 태의령 이혜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다. 이혜는 진월인을 제거시킬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혜는 진월인을 마구 이간질 시켜 분쟁을 일으키고 진월인을 비방하고 진월인을 궁안으로 부터 내쫓아 버리기 위하여 천방백계(千方百計)를 계획하고 실천하였다.

 

결국 이혜의 모함으로 인하여 진월인은 함양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계속 민간행의를 하기 위하여 짐을 다시 꾸려가지고 어느 날 진월인은 효산지구(효山地區:현재 하남성 서북부)로 갈 계획을 세웠다.

이곳은 진나라와 위나라의 국경지대였다. 이혜는 악당들을 국경지대에 매복시켜 두었다. 진월인이 호젓한 국경지대를 지날때 매복해 있던 악당들이 진월인에게 우르르 달려들어 진월인을 칼로 찔러 죽였다. 일대 명의가 이와같이 불행하게 죽고 말았다.

진월인의 시체를 제자들이 그 지역 주민들과 함께 염하여 탕음읍(蕩陰邑:현재 하남성 탕음현)의 복도(伏道)라는 곳으로 옮겨 안장시켰다.

편작은 춘추말기와 전국초기의 신의였다. 문학가들과 사학가들이 모두 편작을 사랑하였다. 민간에 잘못 와전된 전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된 편작에 대한 사실도 많이 있다. 편작은 내과,외과,부인과,소아과,침구과 에 정통했으며 절맥,망색(望色),청음(聽音),사형(寫形:問診)을 통하여 질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변별하였다.

편작은 일생동안 행의 중 가는 곳곳마다 그 지방의 민정을 먼저 살폈다. 환자들이 실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 지방풍속과 생활습관에 따라 치료방법을 변경시켰다. 편작이 한단(한鄲:현재 하북성)에 갔을때 그 지역에서는 부인들을 보다 중요시하는 지역이다는 것을 알았다. 부인들의 생리와 병리는 남자들과 다르기 때문에 편작은 부인 특유의 월경과 적대와 백대와 임신과 생육 등을 중점적으로 고려하여 부인들을 치료하였다. 그래서 이 지방 사람들은 편작을 대하의사(帶下醫師)라고 부르고 부인과의사라고도 불렀다.

후에 편작이 낙양에 갔을때 그 지역은 경노사상이 투철한 지역이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편작은 노인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노인들의 생리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연구하였다. 노인들은 기와 혈이 훼손되어 있고 시력도 약하며 청력도 날이 갈수록 점차적으로 경감되므로 이농(耳聾)과 안화(眼花)는 노인들의 상견병이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그래서 노인들이 이상과 같은 증상들 때문에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불편한 점이 많다는 것에 착안하여 노인들을 치료할때 특별히 유념하였다. 그 결과 이 지방 사람들은 편작을 이목비의사(耳目鼻醫師)라고 불렀다.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오관과(五官科) 의사였다.

그 다음 편작이 진나라 함양에 들어갔을때 이 지방 사람들은 특별히 아이들을 사랑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에 머무는 동안 편작은 소아과 질병치료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이들의 상견병인 경(驚),간(癎),리(痢) 등에 대하여 특별히 주의깊게 연구하여 치료에 임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편작을 소아과의사라고 불렀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비추어 볼때 편작은 여러 방면의 의료기술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임증각과 증치에 정통한 의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작이 행의하던 때는 전국시기 초였다. 그 당시 대하의니 이목비의사니 소아과의사라는 호칭을 얻었다는 것은 한의학 사상 최초로 분과별 치료를 했기 때문이며 사실상 편작은 한의학사상 최초로 분과별 치료를 한 위대한 선구자였다.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篇)에 보면 편작이 노공호(魯公扈)와 조제영(趙齊영)이란 두명의 환자에게 환심술(換心術)을 시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환심술은 사람의 심장을 바꾸는 수술을 말한다. 이 두사람이 편작에게 진찰을 받았다. 편작은 이들을 진찰하는 도중 이 두사람의 체내에 일종의 잠복해 있는 질병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들의 질병을 치유한 후 편작은 이들에게 "당신들의 신상에 숨어있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공호의 심지(心志)는 강한데 기백(氣魄)이 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나면 생각이 너무 많아서 계획을 세우려 할때 결단력이 부족하고 제영은 반대로 심지는 약한데 기백은 강하여 생각이 부족하므로 오히려 함부로 시비를 판단해 버립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당신들의 심장을 서로 교환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심지와 기백에 밸런스를 맞추어 놓았으니 오늘 이후로 모든 일을 행사할때 정확하게 행할 것이요." 라고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두 사람은 편작의 말을 듣고 나서 매우 기뻐하였다.

편작은 두 사람에게 마취주(麻醉酒)를 복용시켰더니 3 일 동안 혼수상태 속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편작은 두 사람의 흉부를 절개하여 심장을 꺼내어 서로 바꾸었다. 마지막으로 창구를 봉합하고 신고(神膏)를 창구에 발라주었다.

고대 한의학 이론에 보면 "심주신지(心主神智)" 라는 말이 있다. 즉 "심장은 사람의 정신과 지혜를 주관한다." 는 뜻이다.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과 일언일행(一言一行)은 모두 심장의 역할 때문이다.

두 사람은 심장을 교환하는 수술을 받은 후 각자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귀가한 후 큰 웃음거리와 말썽을 만들어 냈다.

왜냐하면 노씨는 조씨의 집으로 들어가고 조씨는 노씨의 집안으로 잘못 들어갔다. 노씨 부인과 조씨 부인은 모두 대경실색하였다. 그래서 노씨 부인과 조씨 부인은 어떻게 두 사람을 치료하였기에 이러한 기괴한 일이 발생했는가? 의문을 풀기 위하여 편작을 상대로 관가에 편작을 고소하였다.

다행히 편작이 두 부인들에게 일일이 자초지종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한바탕의 분규는 평온리에 해결되었다.

이상과 같은 고사는 그 당시 시대적 가능성을 초월한 이야기이다.

기나긴 세월속에서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고사들은 어떤 면에서 과장이 많이 있을 수 있으며 또 사람들의 풍부한 상상력이 첨가되어 전해 질 수도 있다.

오래전 이야기이지만 1987 년 미국의 수도 워싱턴(WASHINGTON)에서 제 1 회 인체장기이식과 관련된 약물 학술토론대회가 열렸었다. 그 당시 주최측에서는 편작의 환심도(換心圖)를 논문집의 표지로 결정했다.

편작의 환심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편작의 오른편 손에는 심장을 쥐고 왼손에는 수술칼을 쥐고 있는 그림이었다. 인류 최초의 장기 이식수술의 이상(理想)을 상징하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논문집의 첫 페이지에 위에 기술한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篇)을 영어로 번역하여 기재하였다. 이것은 국제 의학계가 고대 중국 의학과 중국인들의 풍부한 상상력에 대하여 심심한 경의를 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편작은 의학 이론과 맥학과 침구와 기공등 각 방면의 저작을 펴냈다. 편작은 편작내경 9 권과 편작외경 12 권과 편작 맥서 1 권 등을 펴냈다. 편작내경과 편작외경은 황제내경과 더불어 서한(西漢)의 칠대의학경전 속에 들어갔다. 애석하게도 모두 도중에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편작의 저서 난경(難經)과 자오경(子午經)과 지귀경(指歸經)과 옥룡가(玉龍歌)등은 편작의 명의를 빌어 저작자가 사칭되었다. 동한 때 성서된 난경속에 편작의 한의학 자료가 부분적으로 흡수되어 있다. 진(晉)나라때 왕숙화(王叔和)의 맥경(脈經)과 당나라때 손사막의 천금요방 속에 편작의 한의학 자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편작은 사제지간에 전통의학을 전수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편작의 제자들은 많이 있었다. 그중 문헌상에 나타난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자양(子陽),자표(子豹),자용(子容),자동(子同),자명(子明),자유(子游),자의(子儀),자월(子越),자출(子朮),양력(陽歷) 등이 있었다. 편작은 제자들을 성심성의껏 가르쳤다. 그리하여 이들 제자들은 한의학에 조예가 깊은 고명한 의사가 되었다.

중국 각처에 돌아다녀 보면 편작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한 성명(城名), 촌명(村名), 다리의 이름과 산의 이름 등을 많이 듣고 볼 수 있다. 또 전국 각지에 사당(祠堂)과 묘우(廟宇)와 동상과 능묘(陵墓)와 의관총(衣冠塚) 등을 건립하여 편작의 위대한 공적을 기념하고 있다. 음력 4 월 28 일은 편작의 탄신일임으로 매년 이 날이 돌아오면 각 지방에서 편작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