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시들은 늘 어떤 상흔(傷痕)을 노래한다. 시인이 걸어야 했던 일신운화(一身運化)의 길은 거칠고 팍팍한 길이다. 스물세 해 전 쯤 펴낸 첫 시집 《사람》에서 “지금 성한 것은 영원히 성한 것이 아니라고 / 내 믿음을 섣불리 말하면 너는 눈물 안 날 것이냐?”(〈섬진강 내일〉), “5월과 6월이 어떻게 지나갔는가 / 우리 살도 째고 내장도 뜯으며 간 봄”(〈계화교에서〉), “가슴은 새로 쓸 수 있다 하니 다친 가슴 / 단단히 잘 굳으면 나가서 빗줄기를 맞을 때”(〈바람에 불려 차디, 차던〉) 따위의 구절들에, 살림을 들어먹고 고리 사채(私債)에 시달리다 등 맞대고 살던 사람이 뿔뿔이 흩어지며 찢기고 뜯긴 마음의 흔적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그가 시에서 계화도 수몰 이주민의 팍팍한 삶에 제 삶을 겹쳐낼 때 슬픔은 삶의 저 안쪽까지 깊게 삼투하며 어떤 무늬들을 선명하게 새긴다. 황학주의 시들은 그 무늬들을 안고 찬란해지는 것이다.
발췌인용 : "조선일보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황학주편"
깨끗한 증발
황학주作
꼬불꼬불한 불빛을 그리며 막차가 헤엄치고 있다
가로수길 형체가 없는 바람 속에서
참으로 긴 슬픔이 부딪는 잎새소리를 들었다
아직은 내 막막한 욕망에 연결된 삶 때문에
자옥한 외로움의 편력이 바닥을 깔았다
나의 목을 내동댕이 치며.
어떤 날은 오늘이 아닌지
어떤 별은 내일인 듯
그만 스러져 간다
어느 날
자갈에 박히는 물방울처럼
가로수 뿌리보다 강한 사련의 뿌리까지
날아가는 깨끗한 증발,
내 괴롬의 부스럼들이 지워지고 나면
한 삶의 빛도 바래리
어두운 눈꺼풀을 차곡차곡 벗어두고
빛도 문자도 없는 깨끗한 내가 되리.
돌아오지 않는 사랑 속을
자맥질하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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